12V를 48V로 바꾸면 배선이 얇아진다: 존 아키텍처가 여는 전력반도체 승부처
SDV로 가는 자동차 전기·전자(E/E) 아키텍처가 기능 중심 도메인 구조에서 위치 기반 '존(Zonal) 아키텍처'로, 전원은 12V에서 48V 백본으로 옮겨가고 있다. 전압을 높이면 같은 전력에서 전류가 줄어 배선이 얇아지고 손실이 급감하는데, 그 변환의 핵심 인터페이스가 전력반도체다. 현대차·기아가 이 기술을 협력사 최우수상으로 뽑은 사례처럼, 아키텍처 전환은 국산 전력반도체·전장 설계의 새로운 승부처가 되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자동차의 전기·전자(E/E) 아키텍처는 단순했다. 기능별로 독립된 수십 개의 전자제어장치(ECU)를 흩어 놓고, 중앙의 12V 전원에서 각 장치로 전력을 나눠 주는 방식이 표준이었다. 그런데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 무선 업데이트(OTA), 전동화 파워트레인, 고성능 인포테인먼트가 한꺼번에 확산하면서 차량 내부의 전력 수요와 데이터 처리량이 급격히 늘었다. 기존 분산형 구조는 배선 복잡도, 전력 손실, 소프트웨어 확장성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그 해법으로 글로벌 완성차 업계가 택하고 있는 두 축이 존(Zonal) 아키텍처와 48V 전원 시스템이다. 존 아키텍처는 차량을 전방·중앙·후방 같은 물리적 구역(Zone)으로 나눠 각 구역에 고성능 존 컨트롤러를 두고, 무거운 연산은 중앙 컴퓨트로 모으는 구조다. 배선이 존 단위로 짧게 끝나 와이어링 하니스가 가벼워지고, 기능이 소프트웨어로 모여 OTA로 갱신된다. 이 위치 기반 재편이 데이터·연산의 축이라면, 48V는 그 위에서 전력을 어떤 전압으로 흘릴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전자신문 계열 테크월드에 실린 모놀리식파워시스템즈(MPS)의 2026년 5월 기고는 이 전환을 "설계 개선을 넘어 전장 구조와 공급망, 반도체 경쟁 구도를 재편하는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표현했다.
물리는 단순하다. 옴의 법칙상 같은 전력을 보낼 때 전압이 높아지면 전류는 줄어든다. 12V를 48V로 올리면 전류는 이론상 4분의 1로 떨어지고, 배선 저항에서 생기는 손실은 최대 16분의 1까지 감소한다(MPS 기고 기준). 전류가 줄면 더 얇은 도선을 쓸 수 있어 차량이 가벼워지고, 이는 전기차 주행거리와 에너지 효율 개선으로 이어진다. 존 아키텍처와 결합하면 효과는 더 커진다. 차량 전체에는 48V 고효율 전력망을 깔고, 각 존 안에서 필요한 전압으로 정밀하게 변환하는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환의 핵심 인터페이스에 바로 고효율 전력반도체가 자리한다.
- 1/4 12V→48V 전환 시 같은 전력 기준 전류(옴의 법칙, MPS 기고)
- 최대 1/16 배선 저항 손실 감소(이론치)
- ASIL-D 존 컨트롤러가 조향·제동까지 통합할 때 전력 IC에 요구되는 기능안전 수준
MPS 기고가 짚은 전력반도체의 승부처는 세 가지다. 첫째는 변환 효율이다. 각 존의 DC-DC 컨버터가 48V를 12V 이하로 낮추는데, 이때 1~2%의 효율 차이가 차량 전체 발열과 에너지 소비, 나아가 실제 주행거리를 좌우한다. 둘째는 기능안전(Functional Safety)이다. 차량용 반도체는 AEC-Q100 품질 규격과 ISO 26262 기반 진단·보호 요건을 충족해야 하고, 존 컨트롤러가 조향·제동·파워트레인 같은 안전 필수 기능까지 통합하면 전력 IC에도 ASIL-D 수준의 진단·보호가 요구된다. 셋째는 지능형 전력관리로, SDV 환경에서 전원 공급이 소프트웨어와 긴밀하게 연동되는 흐름이다. 성능 경쟁을 넘어 신뢰성과 검증 체계를 갖춘 기업만 대응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이 전환은 이미 국내 공급망에서 구체적 사례로 나타났다. 현대차·기아는 2024년 10월 'R&D 협력사 테크 데이'에서 전자 부문 유라코퍼레이션이 개발한 'SDV 존 아키텍처 구성 요소 기술'을 최우수상으로 선정했다(아주경제 보도). 이 기술은 48V 전원 중추망(Backbone)과 전력반도체를 활용한 전원 공급 설계, 48V/12V 소형 컨버터 시스템으로 구성돼 제어기 통합을 가능하게 하고 48V 체계에서도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반 솔루션이다. 완성차 그룹이 아키텍처 전환의 최우선 기술로 '48V 전원 설계'를 콕 집은 셈이다.
정리하면, SDV로 가는 길목에서 자동차의 전원 아키텍처가 12V 분산에서 48V 백본으로 갈아타고 있고, 그 변곡점의 부가가치가 배선·커넥터에서 고효율 전력반도체와 존 컨트롤러 전원 설계로 옮겨가고 있다. 변환 효율·기능안전·지능형 전력관리라는 세 관문을 통과할 역량을 갖춘 국내 전력반도체·전장 설계 기업에는, 이 구조 변화의 어느 층을 가져가느냐가 다음 성장의 관건이 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다만 48V 대중화 시점과 채택 속도는 완성차 플랫폼 로드맵에 좌우되며, 부품사에는 기능안전 검증과 초기 개발비 부담이 함께 따른다는 점도 균형 있게 봐야 한다.
※ 이 글은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 권유가 아니다. 기술·시장 전망에는 불확실성이 따르며, 투자 판단과 그 책임은 전적으로 독자 본인에게 있다.